■ 은근슬쩍, 목요일의 남자
掌篇小說 外…

사슬(1)

조회수 506 추천수 0 2012.01.05 01:58:30

 

사     

(1)

 

 

 

 

 

 

 

 

  1.

  그러고 보니 무덤덤하다. 그걸 깨닫고 나니 비로소 내가 안쓰러웠다. 하필이면 한강 다리 한 가운데에서 퍽 하고 체인이 끊겼다. 당연히 크게 놀랐지만, 호들갑스러워지지가 않았다. 침착하게 비상등을 켜고 속도를 줄이며 바깥 차선으로 이동했다. 끊어진 체인이 치식거리며 바닥을 긁었다. 뒤로 넘어갈 것처럼 짐을 가득 싫은 오토바이가 동력을 잃고 강바람에 휘청거렸다. 절대로 침착해야 한다는 결심 없이도 고요하게 집중이 됐다. 같은 거리의 도로를 공평하게 굴러야 할 두 바퀴는 체인이 끊어지자마자 금세 소원해졌다. 바퀴 사이의 간격을 달래기 위해 솟은 오한은 바퀴가 겨우 멈추고 난 후에야 막 운행을 멈춘 공랭식 쿨러처럼 후끈 달아올랐다. 내려서 들여다보니 체인을 갈아 먹은 대기어가 날카롭게 낡아 있었다. 다리의 길이는 고작 1.2킬로미터. 남은 길은 육백 미터 남짓. 하지만 갈 수 없는 거리였다. 체인이 끊긴 두 바퀴는 다리를 건널 수 없었다.

  보험회사에 전화를 하기 위해 헬멧을 벗고서야 다시 시간이 흘렀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잠시 얼굴에 표정이 고이지 않았다. 핸드폰 액정의 시간을 보면서 올 초부터 끊은 담배 생각이 잠시 났다. 가게에 다시 전화를 걸어 아내에게 사정을 얘기했다. 무덤덤한  마음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거래처에 전화를 걸어 배달이 늦어진다는 얘기를 싹싹하게 할 자신이 없었다. 전화기 저 쪽, 아내의 놀란 기색은 완연했으나 과연 호들갑스럽지는 않았다. 나이 오십 줄에 용케도 고생 많다고, 놀리듯 어루만지는 농담까지 덧붙인다. 농을 치는 목소리에 미안함이 묻어 있어서 잠시 몸 둘 바를 몰랐다. 못났어도 마누라가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자 비로소 피곤이 몰려 왔다. 신호가 새로 풀렸는지 멀리서부터 한 무리의 차들이 다가왔다. 상황파악을 하느라 잠깐 주춤거리던 차들은 이내 가속음과 함께 시속 칠팔십킬로미터로 가른 바람을 무안하게 갈겨댔다. 오후 세 시로 기울기 시작한 칠월의 땡볕 아래 식은땀에 젖은 목덜미와 등골이 파도치듯 선뜩거렸다.

 

 

  2.

  "봐라. 내가 지금 이렇게 표를 그려 놓고 대응하듯 설명을 하니까 왠지 실질형태소와 자립형태소가 동격이고 문법형태소와 의존형태소가 동격인 것 같지만 절대 그런 건 아냐. 우리가 배우는 형태소의 종류는 네 개지만 그 네 개가 일관된 기준에 의해서 갈라진 게 아니란 말이야. 두 가지 기준에 의해서 각각 두 종류로 갈라놓은 체계라는 거지. "

  기말고사 기간이 끝난 직후의 강의는 잘해야 원맨쇼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온갖 정성을 들여 열심히 설명했다. 학교 시험에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편집해서 강의할 수 있는 기간은 그나마 이 때뿐이었으므로. 중간고사가 끝난 후에는 바로 기말고사 대비로 들어가야 했고 방학이 시작되면 다음 학기의 내용을 선행학습 하는 프로그램이 시작될 것이다. 한 달 안에 한 학기 진도를 모두 빼야 하므로 그 때엔 한 달이 내내 시험기간 같을 것이었다. 기회는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특강이 시작되기 전인 지금뿐. 어쨌든 지금은 내 강의를 할 수 있다. 내가 진심을 담아 전공한 내용을, 내가 공부할 때 느꼈던 감상과 교훈을 실어서, 내가 편집한 자료로, 협소하나마 내가 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강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거 중학교 때 배웠던 거 아니에요? 생활국어에서 나왔던 거." "그래, 맞다! 바로 너네들이 중학교 1학년 때 배웠던…" "근데 그걸 왜 지금 해요?"

  뒷벽으로 잔뜩 밀어 붙인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엎드리다시피 책상을 끌어안은 녀석이 고개만 까딱 쳐들고 '당신 지금 제 정신이야?' 하는 눈으로 날 쳐다보며 물었다.

  "니들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도 모르니까 그러는 거 아냐."

  "어차피 이제 그런 거 시험에 안 나오잖아요. 생활국어 진짜 제일 구린데. 이게 무슨 생활국어야 우리가 이런 걸 생활에서 사용해요?"

  보습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친다는 게 이렇다. 돈을 매개로 한 소통이 본래 그러하듯 이곳에서도 정작 소통의 주체는 약자다. 소통을 지배하는 강자는 돈의 명분. 보습학원에 지불된 돈의 명분이야 뻔한 것 아닌가. 성적, 그것도 만족할 만한 ‘좋은 성적’이라는 환상. 그것을 제공하는 것이 돈을 지불한 이들에게 이 보습학원의 약자들이 약속한 명분이다. 시험이 끝난 지금은 잠시 그 힘의 주기에서 벗어난 유예기간인데, 당연하게도 기회를 만난 소통의 약자들은 잠시나마 강요된 질서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한쪽은 그간 참고 있었던 강의를 준비하는 것으로, 또 다른 쪽은 어떻게든 수업을 외면하는 것으로. 그동안 유린당하고 있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려한다는 점에서 양 쪽의 목적은 같았으나 방식이 서로 반대라는 게 문제였다. 결국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가 관건이었다. 나는 확실히 문법에다 생활국어란 이름을 붙인 건 음흉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대꾸를 시작했다.

  "형태소가 뭔지도 모르니 선어말 어미가 뭔지도 모르고 접사가 뭔지도 모르는 거 아냐. 그러니까 높임법 설명도 맨날 헷갈리고 백날 사ㆍ피동 접미사를 달달 외워도 막상 본문에서 의미 헷갈리면 구분 못 해버리는 거 아냐. 이번 시험 때도 문법 문제는 어렵다고 손도 못 대고 서술형 반을 그냥 비워두니 결국 점수가 그 모양으로 나왔잖아. 지난 번 중간고사 때도 그래. 내가 국어사 단원은 기본문법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어쨌든 시험 끝났는데 왜 또 하는 거냐구요. 중학교 때도 생활국어는 시험기간 때만 한 두어 시간 하고 말았었단 말이에요. 이제 안 나오잖아요. 아 그리고 시험 끝났는데 또 바로 이렇게 수업해야 돼요?"

  알고 있다. 학교 선생들도 일단 진도 빼는 시늉하기에 바빴겠지.

  "국어는 한국어가 모국어인 니들한테 한국어를 가르치려는 과목이 아니야 이것들아. 사칙연산 못하면 인수분해 못하는 거 알면서 기초 문법 모르고 어휘력 딸리면 길고 어려운 문맥일수록 정확한 독해가 안 된다는 생각은 왜 못해. 지금 아니면 언제 이렇게 여유롭게 기초부터 다질 기회가 오겠니."

  "2학기 땐 문법 단원 없다메요. 2학년 되면 문학 배울 거니까 문법은 1학기만 잘 버티면 된다고 해놓고." "잘 못 버텼잖아." "어쨌든 이제 안 나오잖아요."

  이 자식 입을 확 찌…

  "수능에서 적어도 서너 문제는 문법이랑 직접적으로 관련 있어!"

  그래. 주도권 싸움이니 뭐니 해도 어차피 약자. 혁명을 일으킬 수 없는 나는 결국 늑대를 감시하는 파수꾼 흉내를 내며 정당하게 비겁해지는 수를 택했다. 수능이란 말이 나오자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나불대던 녀석뿐만 아니라 관심 없다는 듯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녀석들까지도 순간 눈빛이 움찔했다. 결국 보습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

  "자 진정했으면 다시 보자. 지금 배우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름을 가진 모든 개념들은 개념에 딸린 속성만 탈탈 털어 외워서는 언제 봐도 아리까리하게 되어 있어. 명사와 용언의 어간을 봐. 둘은 실질적 의미의 유무를 기준으로 했을 때에는 같은 종류의 형태소이지만 자립성을 기준으로 했을 때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형태소로 분류 되지. 하나의 기준만 보고 '아 명사랑 용언의 어간은 어쨌든 같은 종류의 형태소구나.'라고 안심해 버리다간 큰 코 다치겠지? 문법이 이래서 어려워. 어떤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렇듯 그 개념이 어떤 체계에 속한지를 봐야 하고 그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 체계가 어떤 기준으로 만들어졌는지를 확인해야 해. 그게 헷갈리지 않는 요령이야. 어떤 체계가 옆에 있는 체계랑 비슷하다고 해서 똑같이 굴러가는 것으로 단정 지어선 안 돼. 어떤 개념이든 자신이 속한 체계에서 완벽하게 독립해 존재할 수는 없거든. 알겠지? 결국 그 개념의 고유성을 파악하기 위해선 아이러니하게도 그 개념이 속한 체계를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앞에서 졸던 녀석이 진심어린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래 나도 내가 니들한테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못 들은 척 얼른 보드에 길고 짧은 문장들을 적어 재꼈다. 등 뒤에서 고유성이 뭐야? 하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수군거림에 더 손이 빨라졌다.

  "무슨 말이긴, 그냥 헷갈리지 말라는 소리지. 실제 예문을 놓고 연습해 보는 게 빨라. 사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낯선 것을 익숙하게 하는 데는 연습이 짱이지. 예문 몇 개 빨리 보고 문제 풀어 보자."

  분노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의자를 번쩍 당겨 앉는 소리가 났다.

  "아, 진짜 수업할 거예요?! 이제 시험에 안 나오잖아요. 수능에서도 서너 문제 정도는 감으로 맞힐 수도 있는데."

  감 좋아하시네. 보드에 네 번째 문장을 다 쓴 나는 돌아서서 크게 외쳤다.

  "자, 문장마다 총 형태소의 개수 먼저 구하고 실질, 형식, 자립, 의존 형태소 각각 몇 개인지 개수 구해봐. 처음이니까 각 3분씩, 에누리 얹어서 15분 준다!"

 

 

 

 

 

 

 

 

 

 

 -계속-

 


댓글 '4'

던버튼서점의아이라

2012.01.05 19:25:00

넘넘 공감되서 공감을 넘어 감탄하고 있어요

아다다

2012.01.05 22:04:52

오 댓글이다!!!

원종화

2012.01.08 01:44:47

매번 글 쓰고 고민에 고민을 또 하시고 막 밤잠 설치면서 다시쓰고 그러시는거죠??ㅋ

아 글 잘쓰는 사람들보면 부러워요 ㅋ

발칙한 아다다

2012.01.08 08:49:54

저도 글 잘 쓰는 사람들 보면 부러워요 ㅠ.ㅠ

 

그리고 종화씨처럼 건강하고 부지런한 사람은 더 부러워요.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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