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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0 02:11

다이어리 수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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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 후반, 아주 애용하던 다이어리가 있었다. 얼마나 내 스타일이었는지 마치 손에 처음부터 붙어있던 아이처럼 모든 일상을 함께했다. 온갖 약속과 행사, 연애사, 회의, 공연, 영수증, 티켓 등등이 그 혼돈 속에서도 나름의 질서로 정리되어 쌓여갔다. 그렇게 매년 걱정 없이 잘 쓰다가 어느 새해부터 갑자기 더 이상은 제작할 계획이 없다는 그 회사로부터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고 홈페이지 고객문의 게시판으로 달려가 제발 어찌 안 되겠느냐고 사정했던 적이 있었다. 이미 앞서 나 말고도 몇몇 분이 그 다이어리의 소식을 물은 흔적이 있었고, 답변은 각기 달랐지만 결론은 같았다. 죄송하다는 것. 그 답변을 쓰면서 또 읽으면서 우리는 모두 참 마음 아파 했던 것 같다.


 시간이 5년도 넘게 흘렀는데 나는 아직도 하나의 노트에 정착하지 못하고 매년 두세 개의 다이어리를 구입하고 또 실패하며 제대로 된 기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찔끔, 저기찔끔. 그게 무슨 말같지도 안한 핑계냐고 하겠지만, 근데 그 다이어리라는 게 참 그렇다. 뭔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으면서 종이가 너무 두껍지도 얇지도 않으면서 좌우로 잘 펼쳐져야 하지만 체신 없게 완전히 막 쫙 벌어지는 건 좀 그런, 너무 흰 종이보다는 약간 미색이 좋고 가름띠의 색이 너무 원색이 아닌, 표지가 너무 화려하지 않은 색이며 미끄러운 코팅이 되지 않은 것이어야 좋다. 굳이 데일리 위클리 먼th리 구분 없어도 되고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무지든 라인이 있든 모눈이든 상관없지만 무지 외의 경우 선이 있다면 너무 짙은 색의 선은 안 되는 - 특히 붉은 모눈 ㄴㄴ. 만년필로 쓸 때 서걱서걱 소리가 나는 건 좋지만 펜촉 끝에 종이 분이 껴서 글씨에 꼬리를 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그러니 재생지 중에서도 면이 너무 거칠거나 잉크를 번지게 하는 건 애석하게도 안 된다. 그러면서도 표면이 너무 미끄러워 연필로 썼을 때 필체가 완전 달라진다거나 흔적을 제대로 남기지 못하면 또. 음. 안녕.


 지류는 펜처럼 테스트를 해 볼 수가 없다. 그러려면 사야 된다. 그 애(愛)다이어리 단종 사건 이후로 나는 12월만 되면 다이어리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늘 장고 끝에 악수를 두었다. 매년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다 두세 해 전부터는 주위에 프리퀀시 앵벌이(...)를 해서 스타벅스다이어리로 연명을 해왔다. 몰스킨의 명성에 비해 나와의 궁합은 그냥 그랬다. 그래도 다이어리를 사서 한두 장밖에 못 쓰고 이노트저노트 전전하다가 결국 그해의 사건이라든가 하는 중요한 것들을 나름 정산 못 하고 넘겨버린 몇 년을 생각하면, 얻어쓰는 스벅다이어리는 비교적 꾸준히 써졌다. 그렇지만 올해는 또 고민에 빠졌다. 스벅다이어리의 구성이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던 것이다. 심지어 종이가 너무 얇아졌다는 기분이 든 건 아마 그냥 새로운 걸 사고 싶어서였겠지. 게다가 그런 정성으로 애써 골라 산 다이어리 역시 한달도 채 못 쓰고 아웃당했고, 나는 다시 수렁에 빠진 기분으로 여기저기 질척대며 메모를 써질러놓기만 했다. 그런데.


 그런데!
 어제 아주 마음에 쏙 드는 아이를 만났다. 사라진다면 당연히 내가 먼저 사라질 것 같은 그런 회사의, 첫 느낌 좋은 노트. 방랑이 끝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노트에 기대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작 노트에, 이런 평온과 집중과 안정이 있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 된다. 그래서 몹시 기쁘다.


 노트 한 권에, 집안 많은 것들이 정돈되기 시작했다. 신난다. 마음에 드는 노트 한 권에 내가 달라지기도 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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