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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5 12:01

해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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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겨울에는 늘 같은 병에 시달리곤 하는데, 그것은 바로 공부병.

 

 

첫 번째 대학을 9년 꽉 채워 졸업하고 2년을 편입으로 더 공부했어도 아직 배우고 싶은 것이 많고 여전히 학생이고 싶다. 하지만 대학원은 언감생심, 지금 갚고 있는 학자금 대출만으로도 여전히 삶은 버겁게 내 나이에다 더 무게를 실어주고 있고, 어마어마한 대학원 등록금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만, 마음을 닫기 일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을 매년 반복한다.

 

그말은, 해가 바뀌어도 경제 사정이 썩 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넉넉하지 못한 부모님을 탓할 나이는 지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그마저도 명분을 잃었다. 실은 나는 10년도 넘게 경제적 가장으로 살아 왔지만, 마음만큼은 늘 가장이 되지 못했다. 외동딸은 독립심이 강하거나 의존적인 성격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데, 나는 어느 쪽이었을까. 독립심이 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늘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외로웠다고 하면 중도파가 되겠지.

 

부러웠다. 척척, 특별히 다른 일을 하지 않고도 연이어 공부를 하고,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데에도 별 어려움이 없는 친구들을 보면서, 펼쳤던 책을 무수히도 덮곤 했다. 좌절의 순간은 늘 그렇게 찾아왔지만 아프지 않다고 거짓말할 수는 없는 일.

 

처음 대학원 시험을 봤던 날, 나는 떨어질 것을 예감했다.

 

"공부는,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학원이고 어디고 일을 하면서 공부에 집중을 할 수나 있겠느냐. 대학원에 오면 돈은 누가 대 주냐. 일을 병행하면서는 제대로 된 결과를 낼 수 없다."

 

틀린 말이 아닌데도, 못내 서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참 쓸쓸했다.

그리고 나는 그해 대학원 시험에 낙방했다.

 

그래도 또 겨울이 찾아올 때쯤에는 학교를 두리번거렸다.

뭘하고 싶었던 것일까. 무슨 공부를, 얼마나, 무엇 때문에.

 

같은 시즌에 동기, 후배, 동생들은 늘 시원시원하게 합격하고, 돈을 내고, 학업을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따뜻한 집에서 살 수 있었고 때마다 연인에게 좋은 선물 하나쯤은 할 수들 있었으며 가정의 화목이 깊었다.

 

상대적 좌절이 더없이 깊어갈 즈음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

더 잃을 것도 없을 때, 나는 한쪽 부모를 잃은 것이다.

부자는 아니어도 한때 중산층은 되었던 우리 집 모든 마이너스를 담당한 아버지가, 이제 세상에 안 계신 것이다.

 

그렇다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제는 동생도 벌이에 나섰다는 정도가 변화라면 변화.

세상에서 살아남는 일은 의외로 모진 마음을 요구한다. 누군가는 눈 뜨면 살아지고 눈감으면 잠드는 세상인데, 또 누군가에게는 눈을 떠도 어둡고 눈을 감아도 잠들지 못하는 거친 곳이 세상이다.

 

괜찮았다.

공부하고 싶은데 언제나 등록금 걱정이 앞서는 것만 빼고는 괜찮았다.

나름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산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 좀 더 악착같아졌으며, 가진 게 없으니 사람을 보는 눈이 그 중 나았으므로 사람과 함께 하는 일들의 성과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면 뭐하나, 어차피 사람의 일은 변덕이 반 이상이고, 신뢰는 내 상황이 좋을 때에나 유효한 카드인 것을.

모든 것은 다 원점이었다.

그만하기가 다행이었다.

 

대학원, 학위 그런 간판이 중요한 거면 정말 공부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공부 생각 없는데 그냥저냥 갈 데 없어 이래저래 뭉개고 있는 사람들보다 내가 더 비난받아야 하는 것인지는 궁금했다.  

학위, 학벌 그런 것보다 나는 그냥 학교에서 자유롭게 공부하는 것이 좋았다.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다면, 이라는 가정은 이미 가정일 뿐이니까 접어두고라도. 아니지, 접어 둘 수 없지. 그게 문제의 다인데. ㅎㅎ

 

아무튼

겨울만 되면 그래서 그놈의 공부병에 시달린다.

 

사이버대학을 두리번거리다가, 이것 역시 아직 나에게 사치가 아닌가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해져서 몇 문장 적어 본다.

 

괜히 일하기 싫어서 공부하고 싶은 것이겠지.

서른셋을 채워 살았어도 아직 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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